나의 살던 고향, 꽃으로 뒤덮였던 역재의 봄은 봄방학부터였다. 초·중학생 때의 봄맞이로 우선 하여야 할 일은 일 년 동안 사용한 활석(滑石)을 확보하는 일이다. 활석은 땅바닥에 놀이할 때 하얀 선을 그리는 돌로 곱돌이라고도 불렀다. 살던 곳에서 약 30리 정도 떨어진 뱀이 아주 많이 사는 그 산에는 모든 돌이 활석이었다. 봄방학 때 하루 날 잡아 동네아이들이 들고 올 수 있을 만큼 왕복 약 50리 길을 걸어서 가져왔다. 기억나는 것은 무거운 곱돌과, 겨우내 얼었던 녹은 길은 진흙탕이 되어 검은 고무신에 진흙이 엉겨 붙어 군화처럼 된다. 읍내의 신작로도 포장이 안 되어있을 때이니 어련하겠는가? 그래도 흙투성이가 된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왔다.

곱돌로 시작된 역재의 봄은 개구리 알, 복수초, 할미꽃, 달래, 돌나물로 이어졌고 개나리, 개복숭아꽃, 매화꽃이 피었고 그러면 농사철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너른 보리밭은 보리이삭이 패면서 녹색의 광활한 바다물결이 일렁였다. 그때는 전기가 안 들어오니 호롱불, 촛불, 남포불, 호야불을 사용했다. 초는 비싸서 못 썼고, 대부분이 석유 호야불을 사용하였는데 유리 심지로 된 불타는 부분을 원통형 유리관으로 보호하였다. 뜨거운 윗부분에는 양철로 만들어진 풀통을 올려놓고 콩을 구워 먹었다.

저녁식사는 밝을 때 즉, 저녁 6시 이전에 먹었으므로 저녁 9~10시가 되면 당연히 배가 고팠다. 저녁간식으로 위의 호야불에 콩을 구워 먹던지, 무, 고구마 등을 먹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건빵, 달팽이 과자, 소라과자, 쫀대기, 아폴로, 테이프, 센베 (전병) 등, 깔끔한 사카린 맛의 옛날 과자라고 불리는 것을 간식으로 하였다. 날이 따뜻해지면 삐비(삘기), 뗏장풀, 장땅(장다리), 찔레순 등도 먹을 만하였고 특히 아카시아 꽃은 참으로 호사스런 맛이 있었다. 찔레순액은 매니큐어로도 손색이 없었다.

겨우내 영양 보충을 못 하였던 닭에게 올챙이를 잡아 주고, 개구리를 삶아 주었는데 그때 삶은 개구리 뒷다리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송절은 소나무 껍질을 벗기면 하얀 종이와 같은 막이다. 이를 한 이틀 물에 담가 송진을 빼서 보릿가루, 밀가루 그리고 당원(사카린)으로 버무려 떡을 만들어 먹었다. 역재방죽 둑 옆에는 먹을 수 있는 진흙이 있었는데 이 진흙과 송절로 만든 떡은 딱 한 번 먹은 기억이 있다. 이 진흙을 걸쭉하게 물에 풀어 마른 풀로 솔을 만들어 집안 벽 곳곳에 맥질을 하여 봄단장을 하였다.

식목일쯤에 벼 못자리를 만들어서 모를 키워, 5월 말에서 6월 초에 모를 심는데 이는 마을의 대축제였다. 모든 일은 서로 품앗이로 요즘처럼 인건비가 나가는 것이 없이 서로 도왔다. 새참, 점심, 저녁때는 동네의 조그마한 잔치였다. 모심을 때면 우리 할머니는 모를 남은 집에서 얻어 오라고 나한테 시켜 거적에 실어 끌고 오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고향의 봄이 지나면, 동네 역재 방죽 가운데의 조그마한 섬에 하늘로 날아오를 만큼 가득히 핀 벚꽃이 그 옛날 고향의 봄을 알리는 피날레, 벚꽃엔딩이었다. 이 역재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었다. 지금 회상해보면 이렇듯 모든 것이 비문명의 극치였고 먹을 것, 입을 것도 아주 열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봄이 될 때마다 가만히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보다도 훨씬 정겨웠고 멋져,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리운 것은 단지 필자 뿐만은 아니리라.